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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서예가 . 서예평론가.전북대 중문과 교수)  
  다시, 「百技不如一誠」을 생각한다
다시, 「百技不如一誠」을 생각한다
- 2008 제13회 산민 이용 서예전을 보고 -

김 병 기
서예가 . 서예평론가.전북대 중문과 교수


Ⅰ.
나는 1997년과 2001년 두 차례에 산민 이용 선생의 작품에 대한 평을 썼다. 당시에 내가 본대로 산민의 작품에 대해서 평한 글이었다. 글씨를 쓰든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작가는 가끔 한 번씩 자신이 과거에 했던 작품이나 글을 돌아보곤 한다고 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가끔 한 번씩 컴퓨터에 들어있는 전에 썼던 묵은 글을 열어서 읽어보곤 한다. 어떤 글을 읽으면서는 등에서 땀이 나고 발바닥이 후끈 거릴 정도로 부끄럽기도 하고 어떤 글을 볼 때면 "아 내가 이렇게 썼었나? 그런대로 잘 썼네."라고 혼자 중얼거릴 정도로 마음에 드는 경우도 있다. 물론 돌아다보면 흠이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설령 부분적인 흠이 보이더라도 스스로 느끼기에 거짓 없이 잘 썼다는 생각이 드는 글을 접하게 되면 왠지 마음이 뿌듯해지곤 한다. 그동안 내가 서예 평론이란 이름 아래 써온 글은 150편이 넘는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산민 이용 선생의 작품에 대해서 쓴 두 편의 글은 언제 보아도 나로 하여금 마음을 뿌듯하게 하는 글이다. 왜 그럴까? "산민 이용"이라는 사람이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산민 이용 선생은 변함없이 생활하고 변함없이 작품에 대한 열정을 발휘하기 때문에 내가 썼던 글을 "거짓말"로 전락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전에 내가 썼던 많은 글 중에서 산민에 대해서 쓴 글을 보면 특히 마음이 뿌듯하다. 나로 하여금 "내가 보기는 제대로 잘 보았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산민 이외에 다른 작가들도 내가 쓴 평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고 있고, 또 작품을 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어떤 작가는 나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한다. 전에 전시를 보고서 그 당시 내가 본 그대로 많은 찬사를 담아서 전시평을 썼었는데 어느 날 그 작가가 엉뚱한 모습으로 변해 엉뚱한 생활을 하고, 또 엉뚱한 작품을 하는 것을 보면 전에 썼던 나의 전시평이 몽땅 거짓말이 돼버리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하고 또 당혹스럽기도 한 것이다.

지난 11월 28일 전주에 있는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전시실에서는 참으로 의미가 깊은 서예전이 개막되었다. [제13회 산민 이용 서예전] 이 바로 그것이다. 실로 "방대하다"고 평해야 할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나는 1997년의 제8회전이나 2002년의 제10회 서예전과 다름이 없는 산민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다름이 없는 산민의 모습"이란 작품에 변화가 없이 상투적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발전이 없다는 뜻은 더욱 아니다. 산민의 이번 전시작품에는 전에 비해 변한 모습도 많았고 발전한 모습도 확연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본질적인 모습이 확고하게 맨 밑바닥에 두텁게 자리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그의 생활도 드러나 보였고, 서예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흔들림이 없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확인이 가능했으며, 서예 공부에 임하는 자세와 방법 또한 초지일관의 신념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작품에 대한 열정도 그대로 드러나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작품을 성실하게 대하고 성실하게 창작하는 산민 특유의 성실성도 그대로 나타나는 전시였다. 이런 까닭에 나는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전에 내가 썼던 글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 글을 그대로 가져다가 이번 13회 전시의 평문을 삼는다고 해도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산민의 작품에 대해 전에 쓴 글들은 산민의 작품집에만 실렸을 뿐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아니었다. 산민의 남다른 겸손함 때문에 작품집에만 실었을 뿐 매체에 공개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이번 전시를 보면서 산민의 작품을 두고 전에 썼던 나의 평을 매체에 공개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처럼 일관된 서예정신을 가진 작가라면 그런 서예정신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참고하게 하고 또 거울로 삼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나는 전에 썼던 글 중에서 산민 선생의 모습을 그린 부분을 일부 발췌하여 수정하고 또 산민의 이번 전시가 가지는 의미를 정리하여 세상에 내놓기로 하였다. 이번 [제13회 산민 이용 서예전] 을 통하여 한국의 서예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 크다.

Ⅱ.
나는 1998년의 제8회 산민 서예전 도록에 실릴 작품을 보면서 산민의 서예를 중국 청나라 사람 원매袁枚가 쓴 속시품續詩品이라는 시를 논한 시(論詩詩) 32首 중에서 제3수인 「博習」과 제10수인 「尙識」, 제11수인 「振采」, 제14수인 「知難」, 그리고 제26수인 「勇改」를 빌어서 평을 썼었다. 그의 〈續詩品〉 제3수 「博習」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萬卷의 책이 山처럼 쌓여 있어야 한 편의 시가 읊으려는 대로 이루어진다. 시와 책의 다른 점은 감정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 고저장단高低長短의 악기(멜로디 악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鐘과 북을 소홀히 한다면,장차 무엇을 울리겠는가? 易牙라는 요리사가 요리를 잘하게 된 것은 먼저 온갖 짐승(먹거리)들을 다 먹어 보았기 때문이다. 거친 것, 하찮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정영精英의 단계에 이를 수 있겠는가? 詩는 감흥으로 짓는 것이기 때문에 많이 배운 것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말은 결코 올바른 말은 아닌 것 같다. 역시 많이 배워야 좋은 詩를 창작할 수 있는 것이다. (萬卷山積, 一篇吟成. 詩之與書, 有情無情. 鐘鼓非樂, 之何嗚. 易牙善烹, 先羞百牲. 不從糟粕, 安得精英. 曰不關學, 終非正聲.)

山民의 글씨는 박습博習 즉 널리 배워 익힌 결과이다. 결코 일시적 감흥을 손재주로 표현해서 얻은 글씨가 아니다. 산민은 요리를 잘하기 위해 온갖 먹거리를 다 맛본 易牙와 같은 자세로 글씨공부를 하였다. 篆.隸.楷.行.草 각체에 관한 법첩들을 두루 섭렵하였고, 近人, 今人의 글씨 중에서도 좋은 점을 언제 어느 때라도 섭취하여 자신의 글씨를 살찌우는 양분으로 삼았다. 산민의 이러한 박습의 자세는 그가 소장하고 있는 10,000여 권의 책이 증명하고 있으며,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고금의 법을 취하여 일기 쓰듯이 매일 써서 출간한 [山民隸書試探] 이라는 책(1990년 간)이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수백 권의 책에서 명언과 佳句를 골라 일일이 출전을 밝히고, 해석을 붙여 출간한 [한묵금낭翰墨錦囊] 이라는 책(1995년 刊)과 최근 3~4년 사이에 발간한 [금문천자문] , [금문으로 쓴 채근담] , 그리고 [금문으로 쓴 한시 삼백수] 한국편과 중국편 등이 산민의 독서력과 박습의 자세와 박습의 실천을 무언의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나는 산민의 [한묵금낭] 육필 원고를 본 적이 있다. 아예 자신의 용도대로 맞춰 인쇄한 원고지에 깔끔하게 정리된 원고였다. 그 많은 원고를 그것도 역시 일기 쓰듯이 매일 조금씩 집필하여 수년 만에 완성한 것이었다. 박습은 결코 소나기 공부가 아니다. 소나기 공부로는 박습을 할 수가 없다.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서 성실성과 진지성을 갖출 때 박습다운 박습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山民은 바로 성실성과 진지성, 일관성을 가지고 박습을 해왔고, 오늘도 여전히 박습하는 가운데 하찮은 것도 버리지 않고 차분히 쌓아 그 쌓은 것을 토대로 정영精英의 서예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 出品한 작품들을 통해서도 山民이 걸어온 博習의 길은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草書로 쓰듯이 술술 써내려간 金文 작품들을 통해서 그 많은 글자들을 字典을 찾지 않고 자형을 외워서 구사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데 여기에서 그의 문자학적인 박습을 볼 수 있고 작품마다 다 출전을 밝히고 또 그것을 한글로 풀어썼다는 점에서 그의 多讀書를 통한 박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구사한 각 서체마다 法帖의 뿌리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법첩에 대한 박습을 실감할 수 있다. 산민 서예의 맨 밑바닥에는 바로 이 박습의 힘이 하나의 원천으로 깔려 있는 것이다.
袁枚의 〈續詩品〉제10수 「尙識」은 다음과 같다.

학문은 활과 쇠뇌 같으며 재주는 활촉 같다. 식견을 가지고 그것들을 거느려야 비로소 과녁을 맞힐 수 있다. 한단邯鄲의 걸음을 잘 배웠으면 본래의 결음을 잃지는 않았을 게고 신선되는 방법을 잘 추구했으면 약으로 잘못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선禪의 등불을 가지고 있으면 홀로 비추고 홀로 알게 되는 것이다. 취하지 않으면서도 역시 취하고 스승으로 받들면서도 스승을 삼지는 말아야 한다.(學如弓弩, 才如箭鏃. 識以領之, 方能中鵠. 善學邯鄲, 莫失故步. 善求仙方, 不爲藥誤. 我有禪燈, 獨照獨明. 不取易取, 雖師勿師.)

「尙識」이란 「識」을 숭상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識」이란 識見, 識力, 다시 말해서 眼目이나 통찰력, 해석력을 의미한다. 활과 쇠뇌가 아무리 많아도 활촉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마찬가지로 책은 아무리 많이 읽고 법첩을 아무리 많이 임서해도 자신의 안목과 통찰력과 해석력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스스로의 안목과 통찰력과 해석력이 있을 때 비로소 법고를 바탕으로 차원 높은 창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산민은 글씨에 대한 천부적 재능이 있다. 그의 유려하면서도 단아한 경필글씨를 보면 그가 글씨에 타고난 재능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글씨에 대한 이러한 천부적 재능은 그로 하여금 글씨에 대한 남다른 식력과 안목을 일찍부터 갖게 했다. 산민은 고금의 법첩을 보면 무엇을 취해야 할 것인지를 쉽게 찾아낸다. 답답하게 모든 法書를 베끼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는 법을 취하기는 할지라도 법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는 袁枚가 말한 대로 취하지 않으면서도 취하고 스승으로 받들면서도 또 스승으로 삼지 않는 점이 있다. 감각이 있고 안목과 해석력이 있기 때문에 취할 것과 취하지 않을 것을 빨리 구분해 내는 것이다.
원매의 〈續詩品〉제11수 「振采」는 다음과 같다.

밝은 구슬은 흰색은 아니고 정련한 금金은 노랑 색이 아니다. 미인이 앞에 있으면 찬란하기가 아침 해와 같다. 비록 선골仙骨을 타고 났다고 해도 역시 격에 맞는 단장을 해야 한다 목욕이 아니면 어떻게 몸을 깨끗이 할 수 있으며 향기를 배이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몸에서 향기가 나게 할 수 있겠는가? 천하의 미인인 서시西施라 해도 봉두난발이면 결국은 아름다울 수 없다. 만약에 화려한 깃털이 아니라면 어떻게 봉황새를 가려낼 수 있겠는가?(明珠非白, 精金非黃. 美人當前, 爛如朝陽. 雖抱仙骨, 亦由嚴粧. 非沐何潔, 非薰何香. 西施π\髮, 終竟不臧. 若非華羽, 曷別鳳凰.)

「振采」는 시에 문채文采 즉 적절한 수사를 베풀어야 함을 뜻한다. 절세미인인 서시西施라고 해도 봉두난발이면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참다운 「振采」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다. 서예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널리 배워서 기초를 쌓고 창작능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蓬頭亂髮 같은 글씨를 썼다면 그 글씨를 두고서 결코 아름답다고 평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글씨도 때로는 적절한 화장이 필요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깔끔한 자태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바로 이 "깔끔"이라는 측면에서 산민의 글씨는 돋보인다. 산민의 글씨는 결코 잡스럽지 않다. 마치 갓 목욕하고 난 후와 같은 깨끗함과 비누향기가 솔솔 풍기는 것 같은 청량감이 있다. 산민 글씨의 이러한 깔끔성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산민이 이렇게 깔끔한 글씨를 쓰는 것은 그의 몸가짐부터가 깔끔하기 때문이다.
어떤 서예가는 자신의 서예실을 보다 작업실다운 분위가가 나도록 하기 위해 어지럽게 먹물이 묻은 종이, 먹물 통, 篆刻用 印材와 刻한 후의 돌가루 등을 치우지 않고 그냥 놓아두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서예는 근본적으로 그러한 "작업"이 아니다. 서예는 몇날 며칠을 두고서 지우고 덧칠하고 다듬어서 완성하는 유화와도 다르고, 오랜 시간동안 깎고 다듬고 문질러서 완성하는 조각과도 다르다. 서예는 평소에 수양된 인품과 쌓인 독서량과 정련된 기법이 가슴속에서 융화되어 그 융화된 바가 일회성의 필획을 통해 샘솟듯이 표출되는 일종의 순간예술이다. 따라서 例의 작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면이 있는 것이다.
산민은 작업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연구실은 그야말로 연구실이고 서실일 뿐 작업실이 아니다. 정연하게 정리된 책, 반듯하게 놓인 서탁과 종이먼지마저도 없이 깨끗하게 펼쳐진 모전毛氈과, 붓 한 자루 메모지 한 장도 항상 놓여있어야 할 곳에 바르게 놓여 있다. 그 속에서 산민은 작품을 하고자 할 때는 미리 재단해서 두루마리로 준비해둔 종이를 펼치고 붓 끝에 정신을 모아 일기아성一氣¿ú成으로 써내려 간다. 마치 소프라노나 테너 가수가 미리 준비된 오케스트라 앞에 서서 한 순간 지휘자와 시선을 맞춘 다음 펼쳐지는 반주에 맞춰 심흉心胸을 토해서 노래를 부르듯이 산민은 언제 어느 때라도 지.필.묵이 자신의 영감을 맞아들일 수 있도록 항시 정갈하게 준비해 두고 마음이 발동할 때면 군더더기가 필요 없이 깨끗하게 작품을 뽑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山民의 작품은 깔끔하다. 袁枚는 "비록 仙骨을 지니고 있더라도 또한 嚴粧을 해야 한다(雖抱仙骨, 亦由嚴粧)"고 했거니와 여기서의 엄장이란 절제되고 세련되어 격에 맞는 「振采」를 의미한다. 결코 잡다하게 분칠하고 눈썹을 그리고 입술을 그린 천박한 화장이 아니다. 서예에 있어서의 진채도 바로 절제되고 세련되어서 격에 맞는 청아한 꾸밈을 말하는 것이다. 산민의 글씨에는 바로 그런 振采가 있다.
袁枚의 〈續詩品〉제14수 「知難」은 다음과 같다.

조괄趙括은 어린아이여서 군사는 쓰기 쉬었고 조충국趙充國은 만년에 접어들어서도 더욱 더 자중하였다. 그렇게 된 까닭을 묻는다면 그 까닭은 바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에 있다. 맛을 알면 먹기가 더 어려워지고 맥脈을 알면 병 고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렇게 해서 긴 세월 지나면 만인의 재주에도 다 맞설 수 있게 된다. 이야기하기가 어찌 쉽겠나? 종이위에 먹 묻히는 일을.(趙括小兒, 兵乃易用. 充國晩年, 愈加持重. 問所由然, 知與不知. 知味難食, 知脈難醫. 如此千秋, 萬手齊抗. 談何容易, 著墨紙上.)

어린 아이는 간장도 콜라로 알고 마신다. 철이 없기 때문이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간에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속어가 있다.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항상 겸허하게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조금 아는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자신을 내세운다. 진정으로 맥에 통달한 의사는 치병을 더욱 어렵게 여겨서 겸허하고 신중하게 환자를 돌보지만 섣부른 의사는 스스로 명의인양 함부로 침을 놓고 함부로 약을 쓴다.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느낄 때가 진정으로 무언가를 알게 될 때이다. 서예도 마찬가지다. 글씨의 어려움을 알 때가 바로 서예인으로서 철들기 시작하는 때이다. 산민은 글씨의 어려움을 아는 서예가이다. 그는 항상 글씨를 모른다고 말하지만 그래서 그는 글씨를 아는 서예가이다. 알지만 모르는 서예가이고 모르지만 아는 서예가가 바로 山民이다. 산민은 서단에서 여러 차례 "長"을 맡은 적이 있다. 그리고 전국 곳곳에서 그를 찾아오는 제자 또한 적지 않다. 여러 서예 단체의 "長"을 역임한 까닭에 본인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산민은 여러 서예인들 앞에 서서 인사말이나 축사를 해야 할 일도 여러 차례 있었고 대중들 앞에서 이야기할 기회도 많았다. 그러나 필자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山民은 그 어떤 자리에서도 서예란 무엇이라고 힘주어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글씨를 어떻게 써야 한다고 말한 적도 없다. 그저 인사할 자리에서는 인사를 하고 축하한다고 말해야 할 자리에서는 축하한다고 말한 뿐 함부로 서예를 말하지 않는다. 袁枚의 표현대로 "이야기하기가 어찌 쉽겠나? 종이 위에 먹 묻히는 일을."이라는 점을 항시 느끼고 있기에 그는 수십 년간 서예를 하고 지금은 한국 서단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는 서예를 함부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산민은 知難의 서예가이다. 서예의 至難함을 아는 知難의 서예가인 것이다.
袁枚의 〈續詩品〉제26수 「勇改」는 다음과 같다.

천 번을 불러도 오지 않다가 창졸간에 갑작스레 오기도 하고, 10년 동안 사랑을 믿고 교만하다가 하루아침에 버림을 받기도 한다. 사람은 만족할 줄 아는 게 중요하지만 오직 배움만은 그렇지가 않아서 사람이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하늘의 교묘함이 전해지지를 않는다. 한 가지의 중대한 잘못을 알게 되면 한 가지 중대한 경지로 들어가게 된다. 生金이란 것도 있기는 하지만 한 번 주조해 버리면 형태가 정해진다.(千招不來, 倉猝忽至. 十年矜寵, 一朝捐棄. 人貴知足, 惟學不然. 人功不竭, 天巧不傳. 知一重非, 進一重境. 亦有生金, 一鑄而定.)

「勇改」란 용감하게 고친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즐겨 쓰던 득의한 방법이나 작법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옳지 않다거나 부족하다거나 혹은 진부하다고 느꼈을 때는 서슴치 않고 고쳐서 변화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변화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의도적으로 변화를 위한 변화를 추구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오히려 변화다운 변화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袁枚도 "천 번을 불러도 오지 않을 수 있는 것(千招不來)"이 변화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확연한 깨달음 속에서 우연처럼 변화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래서 원매도 변화는 "倉猝忽至"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진정한 변화가 오게 되면 오랜 세월동안 사랑받던 기존의 작법은 하루아침에 버림을 받게 된다. 이러한 "十年矜寵, 一朝捐棄"의 변화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勇改」이다. 산민은 변화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다. 그러나 변화를 위한 억지 변화는 시도하지 않는다. 변해야 할 "所以然(까닭)"이 있을 때 변한다. 새로운 것을 만나거나 찾았을 때 산민은 단지 참신하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시도하지 않는다. 그 "만난 것"과 "찾은 것"을 산민은 오랫동안 두고 본다. 두고 보면서 그 속에서 자신이 취할 바와 능히 취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또 찾는다. 그리고 그것이 찾아졌을 때는 과감하게 자신의 작품 속으로 그것을 끌어들여 변화를 시도한다. 그러므로 山民의 글씨는 변화가 없는 것 같은 가운데 변화가 있다. 어제와 오늘이 확연하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몇 년간의 작품을 모아놓고 보면 그 안에서 파문을 일으키며 변해온 뚜렷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Ⅲ.
배운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배움은 곧 성장을 의미하고 성장은 보다 나은 삶의 영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쌓아 가는 배움도 있고 덜어내는 배움도 있다. 때로는 많이 쌓음으로써 높이 올라 멀리 보는 배움을 지향하고 때로는 자꾸 덜어내고 비워서 정허靜虛한 마음으로 자신의 본성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려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나, 배움이란 어떠한 배움이든 간에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움을 견고히 하기 위해 스승을 모신다. 스승은 꼭 나를 가르치는 인물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다 스승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인 두보는 "轉益多師是汝師"라고 하여 "이리 저리 너에게 필요한 것을 많이 배우려고 하는 자세, 그 자체가 바로 너의 스승이다"고 하였으며, 백거이는 "배움에는 일정한 스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써 스승을 삼으면 된다.(學無常師, 以眞爲師)"고 하였고, 소동파는 "天眞爛漫이 바로 나의 스승이다.(天眞爛漫是吾師)"고 하였다. 우리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스승이다.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는 것이 없다. 계절의 변화를 통해 장유유서의 도리를 배우고, 흐르는 물을 보며 공자께서 말씀하신 「흐르는 것」의 의미를 새기고, 발부리에 차이는 돌을 보며 위대한 침묵과 인내를 배우고…… 이처럼 모든 것이 다 배움의 대상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네 사람이 오만하고 방자하여 이들의 가르침을 팽개치고 배우려 들지 않는 것이다. 滿招損, 謙受益! 가득 차면 덜어냄을 자초하게 되고 겸손함은 더해짐(益)을 부른다. 스스로를 가득 찬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오만에 빠져 있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게 되고 스스로를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겸손함이 있을 때 배움을 절로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청나라 때의 큰 서예가인 하소기何紹基는 평생 동안 장천비張遷碑를 그의 심미관을 반영한 그 모양 그 방식대로 변함없이 임모하였고, 30대 이후부터는 한번 그의 체로 자리 잡은 행서의 모습도 크게 변함이 없이 그 모습 그대로 평생을 일관하여 썼다. 어설픈 변화를 의도적으로 시도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깨달음과 더 맑은 정화淨化를 향해 「다지기」공부를 해 간 것이다. 하소기가 장천비를 평생 동안 큰 변화 없이 임서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 〈張遷碑 臨本〉을 걸작으로 평하지 않는 사람이 있던가? 또 명나라 사람 동기창董其昌이 평생 동안 유려한 필치로 거의 같은 형태의 글씨를 변함없이 썼다고 해서 그를 대서예가의 반열에서 빼내기라도 했던가? 그리고 청나라 사람 강유위康有爲가 그의 독특한 서체를 창조한 후 평생 동안 그 글씨로 일관했다고 해서 그의 글씨를 보잘 것 없는 글씨로 취급하는 사람이 있던가? 결코 아니다. 하소기도 동기창도 강유위도 다 명가요 명필로서 이름이 남아 있고 그 이름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서예는 변화가 능사가 아니라, 다지고 다져서 深化와 淨化를 지향하는 예술임을 알아야 한다. 욕구의 분출을 그대로 수용하고 천변만화하는 심리 상태를 적나라하게 표현함으로써 소위 "솔직한 자아 표현"을 빙자하는 현대 서구 미술의 조류를 "선진 예술"이라는 이름아래 우리의 서예에 애써 대입시킬 필요가 없다. 피카소는 일찍이 "예술은 정결할 필요가 없고 정결한 것은 예술이 아니다."고 외치면서 야하고 거친 작품들을 제작하였고 그것이 그의 지명도를 높이는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우리 한국의 전통 미학이나 중국의 미학에서는 무엇보다도 예술의 정결성을 강조하는 정화미淨化美와 승화미昇華美를 추구해 왔다. 그것이 서구의 생각과 다른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우리 서단에는 정결하지 못해도 괜찮으니 어쨌든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면서 변화만이 가치가 있는 작업으로 인정하려는 조류가 형성되어 설익은 사람들이 무책임한 "試作"을 쉽게 내놓는 풍조가 성하기도 하였다. 예술에서 "試作"은 언제라도 필요하다. 그러나 試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찰이요,「다지기」이다. 「다지기」를 게을리 한 채 설익은 試作에 주력하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다. 자칫 추사가 말한 대로 "자기를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서예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게 한국서단의 현실이다. 이러한 잘못된 개념의 변화풍조아래서도 의연히 자기 모습을 지키며 「다지기」를 하고 있는 산민의 모습은 아름답다. 전시회라면 으레 기상천외한 엽기적인 작품 하나쯤은 들고 나와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빠져 있는 일부 大家 아닌 大家들에 비해 정결한 「다지기」를 하고 있는 산민의 모습이 더 보기 좋은 것이다. 산민은 예나 지금이나 하소기가 했던 대로, 동기창이나 강유위가 했던 대로 그리고 추사나 창암이 했던 대로 정화와 심화, 내실화의 「다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민은 왜 그렇게 오랫동안 「다지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산민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대 끝에 올라서 있는 것은 올라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추락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넓고 깊은 기초가 없이 외줄로 세워진 장대 끝에 올라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올라선 것으로 여겨 자만에 빠져 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추락의 고배를 마신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산민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산민은 끊임없이 다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국전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으나 자만에 빠져 「다지기」를 안 한 탓에 지금은 형편없이 전락한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다지기」가 필요하다. 창작과 변화를 빙자한 어설픈 장난이 아니라 지루하게 느낄 정도로 성실한 「다지기」가 필요한 것이다. 산민은 예나 지금이나 이 「다지기」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올라선 것으로 말하자면 산민만큼 올라 선 사람도 드물다. 젊은 시절의 수상 경력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외의 권위 있는 서예전에 초대 출품한 경력만도 수십 회, 대한민국서예대전을 비롯한 각종 서예 공모전에서의 화려한 운영 경력과 심사 경력, 다양한 저서 출간, 후학 지도, 대학 출강, 한국서예협회 부이사장, 한국현대서예.문인화협회 이사장,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 등 한국 서단을 영도한 경력 등으로 보아 산민이 한국 서단에서 점유하고 있는 위치는 결코 낮지 않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겸손하게 深化와 淨化의 「다지기」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특히 더 그렇다. 애써 기발성을 드러내려고 한 작품도 없고 세상의 주목을 끌기 위해 제작한 엽기적인 작품도 없다. 그저 잔잔하고 편안한 작품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오랜 동안 다져진 산민의 모습이 들어 있다.
산민은 이미 높이 올라온 작가이고 앞으로도 더욱 높이 오를 수 있는 작가이다. 그의 博習 정신과 尙識의 안목과 진정한 꾸밈인 정결한 振彩를 꿈꾸는 예술적 감각과 서예의 至難함을 아는 知難의 겸손함과 勇改의 의지가 있기 때문에 산민은 더 높이 오를 수 있는 서예가이다. 그리고 轉益多師하고 以眞爲師하며 天眞爛漫을 스승으로 삼는 성실함이 있기 때문에 산민은 장대 끝이 아닌 高山위의 磐石과 같은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는 서예가이다. 그러나 한 계단 오르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높이 오르기 위해서는 짐을 벗어내야 한다. 그래서 산민은 짐을 벗어놓았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의 자리마저 벗어버림으로써 산민은 이제 자유인이다. 산민이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의 자리를 내놓는다고 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다. 왜 갑자기 그 자리를 내놓는 것일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복잡한 의문과는 달리 그의 답은 너무나 간결하고 명료했다. "작품에 몰두하기 위해서"라고. "환갑을 맞고 보니 작품을 창작하는 일 외에 더 이상 다른 데에 시간을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어느 날 문득 강하게 밀려 왔다."고. 그렇게 짐을 벗어버린 후에 산민은 이번 전시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오늘 날 우리 한국 서예계에 귀감이 될 만한 작품전을 가졌다. 짐을 벗어버린 산민은 이제 高山 위의 반석과 같이 더 높은 곳에 오르는 일만 남았다. 머지않아 그런 날을 맞으리라고 생각한다.

Ⅳ.
2008년 11월 28일, 한국 소리문화의 전당 전시실 초입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산민의 서예에 대해 말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장관이었다. 일층으로부터 이층까지 한 공간으로 터진 높은 벽의 전시장 사면을 빙 둘러가며 전시한 산민의 〈금문으로 쓴 한시 삼백수(중국편)〉는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나는 아직도 장관이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언제 저렇게 많은 작품을 했을까? 거의 화선지 전지 크기에 가까운 종이 300장에 마치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쓴 것처럼 한 기운으로 쓴 작품을 일정 높이의 온 벽이 다 차도록 전시를 해놓았으니 관람객들은 누구라도 그 방대한 작품 앞에서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금강경 5,000여 자를 한 기운으로 써서 병풍으로 꾸민 작품 앞에서도 사람들은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번 2008년 [제13회 산민 이용 서예전] 을 보면서 다시 한 번 「百技不如一誠」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百技不如一誠! "100가지 기술이 있어도 한 가지 성실함만 못하다."는 뜻이다. 이것저것 재주가 좀 있다고 해서 그 재주를 믿고서 불성실하게 사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아니, 성공할 수 없어야 한다. 타고난 재주는 좀 부족하더라도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성공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물론 타고난 재주도 있는데다가 성실하기까지 하다면 금상첨화이다. 그런 사람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산민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타고난 재주도 재주려니와 남다른 성실성으로 안하여 산민의 서예는 더욱 빛이 나고 마침내 한국 서단에 우뚝 서게 되었다. 우리는 [제13회 산민 이용 서예전] 에서 배울 점이 많다. 산민의 필력, 산민의 창작정신, 산민의 작품성 등 배워야 할 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 중에서 특히 배워야할 점은 바로 「百技不如一誠」의 성실성이다.

세계는 지금 금융위기로 인하여 난리를 치르고 있다. 전 세계가 다 경제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하며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금융위기, 경제 위기는 사실상 진작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이른 바 "파이낸셜 캐피탈리즘"이라는 게 말이 좋아 "금융자본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이지 사실은 "돈 놓고 돈 먹기"라는 도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실체가 없는 거품의 자본주의였다. 실체가 없이 돈이 돈을 모으고 돈 위에 돈이 쌓이면서 나중에는 돈이라는 것마저 꼬리를 감추고 오직 숫자만이 난무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숫자의 거품에 매몰되어 숫자를 믿고서 질펀하게 낭비를 해오다가 결국은 지금의 경제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경제가 "금융자본주의"의 거품 위에서 춤을 추는 동안 사람들은 식량이 생산되지 않아도 돈으로 밥을 해먹을 수 있을 것처럼 농업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실체"의 산업을 홀시하였고 "패션"이라는 이름 아래 멀쩡한 실물을 다 버려가면서 유행이라는 거품을 쫓아 다녔으며,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어 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한 번 형성된 거품을 유지하면서 거품 위에 안주하기 위해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을 부끄럼 없이 해 왔다. 어떻게 소비가 미덕일 수가 있겠는가? 조금만 이성을 가지고 생각해보아도 금세 알 수 있는 일을 애써 모르는 채 고개를 갸우뚱거려가며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을 해 온 것이다.
이렇게 거품 위에서 사는 동안 인류는 예술도 거품예술을 해왔다. 안으로 다져진 실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인간의 내면정신을 정화하고 승화하려는 노력을 하는 예술보다는 일시적인 주목끌기로 사람들을 모으고 사람들이 모인 만큼 돈을 모아서 인기도 누리고 부도 누리면서 예술은 곧 부를 창출하는 것이고 또 부를 창출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심지어는 눈속임 즉 "사기"여도 좋으니 대중의 관심만 끌면 된다는 생각에 "예술은 사기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 사람도 나타나게 되었다. 어떻게 예술이 사기일 수가 있겠는가? 금융자본주의가 몰고 온 거품이 경제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예술 각 방면에 만연하자 성실성에 바탕을 두고서 정화와 심화, 청정성과 해탈성을 추구하는 동양의 예술정신은 고개를 들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고개를 들기는커녕 거품 속에 매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청정하여야 할 예술이 상업이 되기도 하고 사기가 되기도 하여 어지러운 춤을 추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 조류가 거의 전 세계에 퍼졌다. 이러한 국제적인 예술 조류(사실은 조류도 아니다. 거품일 뿐이다)의 영향 아래 우리나라의 서예도 그러한 조류를 타는 것이 바로 선진 예술로 나아가는 길인 것처럼 선동하는 일부 사이비 서예가들에 의해서 적지 않게 사기성을 띤 불성실한 작품들이 인정을 받기도 하고 대중의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이제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그동안 거품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거품을 가지고 세계경제를 이끈다고 자부했던 미국만을 탓할 게 아니고 그러한 미국을 믿고 "돈 놓고 돈 먹기"에 투자한 일부 경제인만 탓할 게 아니라, 우리 서민들의 가슴 가슴마다에도 어느 정도 가품은 다 쌓여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서예가들도 결코 그런 거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평소의 연마와 다지기를 게을리 한 채, 일시적인 재치와 기분으로 불성실하게 쭉쭉 그은 몇 개의 선으로 채운 작품 아닌 작품을 어떻게 몇 백 만원 심지어는 몇 천만 원씩 받고서 팔려고 했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한다. 그리고 기본 필획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면서 고민이라고는 없이 그 옛날 서사용으로 쓰던 글씨를 익숙하게 써가지고 그것으로 작품전을 열고서 서예가로 행세를 한 적은 없는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런 불성실의 거품을 빼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서예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성장할 수 있다.
몇 백 조원을 투자한다고 해서 거품이 영원히 유지되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거품은 빠지게 되어 있다. 아무리 붙잡아도 소용없이 처절하게 거품이 빠지고 나면 인류가 얼마나 비참한 모습을 하게 될는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어느 정도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보다는 분명히 나쁜 상태로 한 동안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다. 거품에 취해 있다가 어느 날 거품으로부터 실체로 눈을 옮기고 보니 당장 먹고 살 식량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인류는 치열한 식량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 소비가 미덕이라고 외치며 흥청대다 보니 환경은 심각하게 오염되고 자원은 거의 고갈이 되어 앞으로 오염되고 파손된 환경으로부터 얼마나 큰 대가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 인류가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대가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더 큰 대가를 받기 전에 빨리 거품을 걷어 내야한다. 인류가 본래 미덕으로 삼았던 성실과 절약과 절제를 회복해야한다. 이제 동양 한자문화권 문화의 정수인 서예가 앞장을 서서 그러한 미덕을 되살려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서예가 먼저 성실하고 청정한 서예로 되살아나야한다. 산민의 서예는 이 엄청난 거품의 어지러운 춤 속에서도 변함없이 성실성을 지켜왔다는 점만으로도 이미 훌륭하다. 21세기 한국서단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청정성도 갖추고 있으니 다시 무엇을 말하랴. 여기에 2008년 [제13회 산민 이용 서예전] 의 가장 큰 의미가 있다.
산민 선생. 구름 위에 오르지도 않고 바람을 타고 날 생각도 없이 그저 튼튼한 땅위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서 서예를 서예로서 하는 진정한 서예가로 오래 남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반짝하는 재치보다는 성실이 무르녹아서 자연히 작품이 이루어지는 그런 서예가로서 오래오래 활동하고 또 후학들을 이끌어 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추사 선생이 쓴 작은 글씨 중에 다음과 같은 시를 쓴 작품이 있다.

路絶空林無問處, 幽奇山水不知名.
松門拾得一片 , 知是高人向此行.
길은 끊기고 텅 빈 숲엔 아무도 없어서 길을 물을 곳도 없는데
기이한 풍경의 산과 물은 이름조차 알 수가 없어 방향을 가늠하기가 어렵네.
소나무 숲길이 문처럼 열리는 곳에서 나막신 한 짝을 주워 들고서야
高人께서도 이 길을 따라서 간 줄을 비로소 알았네.

나는 산민 이용 선생을 이 시 속에 나오는 高人으로 추켜세울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추켜세우지 않더라도 산민에게 高人의 덕과 향기가 있다면 "自香其向"할 것이기에 굳이 내가 나서서 추켜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거품에 묻혀서 제 갈 길을 잠시 잊었던 한국의 서예, 그리고 서예가들에게 산민의 서예에 내재해 있는 "百技不如一誠"의 성실성은 하나의 이정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산민의 글씨는 그 성실성만으로도 뒤에 오는 사람에게 이정표 역할을 한 高士의 나막신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기에 글의 말미에 이 시를 붙여 본 것이다. 산민 선생이 있어서 한국의 서예가 더욱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이 글은 「월간서예」 2009년 1월호와 2월호에 연재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