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2004-11-01  7793  
김병기 (공주대 교수, 중문학 박사, 서예평론가)  
  博習, 尙識, 振采, 知難, 勇改
- 山民 李鏞의 書藝世界 -


. 들어서면서
겉모양만을 닮게 그리는 形似로써 그림을 論한다면,그러한 견해는 유치한 어린이의 소견과 다를 바 없다네. 詩를 짓는데도 詩란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된 시인이 되지 못하리. 詩와 그림은 본래가 한가지 法이니, 그 요체는 다름아닌 天工과 淸新이라네. (論書以形似, 見如兒童隣. 爲詩必此詩, 定知非詩人. 詩書本一律, 天工與淸新.) 이것은 宋나라 때의 大詩人이자, 서예가요,畵家였던 東坡 蘇軾이  陵의 王主簿가 그린 折枝圖에 題하여 쓴(書 陵王主簿所畵折枝) 詩이다. 東坡는 여기서 詩와 그림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완전히 같은 성격인 一律의 藝術임을 천명하고 있다.아주 적절한 비유가 돋보이고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명쾌하게 들어난 훌륭한 詩이다. 그렇다면 詩, 畵만이 一律의 예술일까? 그렇지 않다.
중국문화, 아니 漢字文化圈국가의 전통문화에서 詩 書 畵 三者의 관계가 불가분의 관계임은 이미 公認, 共識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들 三者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설득력을 갖고 있는 말은 「書와 畵는 根源이 같다」는 뜻의「書畵同源說」과 「詩는 형상이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형상이 있는 詩이다.」라는 뜻의 「詩是無形畵, 畵是有形詩」라는 말일 것이다. 소위 「書畵同源說」은 중국에서 書나 畵를 하나의 예술 활동으로 인정하는 시각이 정착되는 시기인 東晉시대에 書藝術에 부여된 예술성과 繪畵藝術에 부여된 예술성이 근원적으로 같다는 뜻에서 생겨난 말이다. 그후로 書畵同源說의 理念과 傳統은 깨지지 않고 발전적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옴으로써 중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국가에서는 書와 畵를 一事요 一律 로 보고 있다. 그리고 詩와 그림을 같은 성격의 예술쟝르로 同一視하는 경향은 唐代의 文人山水畵가 詩的분위기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宋代에 이르러서는 소위 「詩畵一律論 이 성립되어 詩와 畵를 완전히 같은 성격의 예술로 인정하게 된다. 따라서, 宋代에는 長舜民의 「詩는 形象이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형상이 있는 詩이다.」(詩是無形畵, 畵是有形詩)라는 말을 비롯하여, 東坡의 「두보(小陵)의 詩는 형상이 없는 그림이고, 韓幹의 그림은 말이 없는 詩라네.」(小陵翰墨無形畵, 韓幹丹靑不語詩), 그리고 黃庭堅의 「李侯는 詩句를 글이나 말로써 吐해 내기를 원치 않아, 엷은 먹색의 그림으로 소리없는 詩를 그려 놓았네.」(李侯有句不肯吐, 淡墨寫作無聲詩)등, 詩와 畵를 동일시하는 발언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東坡는 앞에서 살펴본 〈書 陵王主簿所畵折枝〉詩에서 「詩畵本一律」이라고 말함으로써 詩와 畵가 본래부터 一事요, 一律임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詩 書 畵를 보는 이상과 같은 觀點들을 모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書와 畵는 근원적으로 같은 것이다. 그런데, 詩와 畵는 一事요 一律이다. 그러므로, 詩와 書의 관계 또한 一律이요 一事다.」이러한 까닭에 중국에서는 北宋代로부터 소위 「詩 書 畵一律論」이 형성되었고, 文人 學士들은 詩 書 畵를 一身에 겸비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이로부터 소위 「詩 書 畵 三絶」이라는 말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는 詩論으로 書藝를 논하고 書論이나 畵論으로 詩나 書를 論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 山民 李鏞의 書藝世界
지난 8월 말, 나는 더위속에서 새학기 강의 준비의 마지막 과제로 淸나라 사람袁枚가 쓴 〈續詩品〉이라는 論詩詩 32首를